태백산맥 문학길을 따라가다.
벌교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보성군에 속한 벌교읍을 말한다. 본래 낙안군에 속했던 벌교는 일제에 의해 1908년 낙안군이 폐군되면서 순천군과 보성군으로 분할되는데, 이때 벌교지역이 보성군에 편입된다. 한일합병이 되기도 전 지방사의 뿌리가 뽑힌 벌교는 통한의 역사를 간직한 채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고 항일감정에 대한 표출은 의병운동 등으로 역사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지리적으로 순천만·여자만을 끼고 고흥·순천 등으로 빠지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제는 현재 벌교읍에 터를 잡고 수탈을 위한 식민지 포구로의 개발을 시작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배척하려 했던 일본은 지역의 상징적 근원인 홍교를 폐교하려 하였지만 기상과 고집 있는 벌교 민들의 힘으로 지켜내면서 벌교의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또한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데, 소설속에 나오는 현부자네 집, 소화의 집, 김범우의 집까지 모두 현재까지 현존에 있는 건물들이므로 벌교의 태백산맥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를 모두 볼 수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
소재지 : 벌교읍 회정리 357-2
2007년 문학관 건물 준공 2008년 개관
지상 2층으로 세워진 태백산맥 문학관은 태백산맥을 형상화한 건물이다. 작가의 육필원고와 증여작품 등 총 144건, 623점의 전시물품을 보유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품 전시관'이다.
현부자네 집
소재지 : 벌교읍 회정리 357-2
태백산맥의 첫 장면이 묘사된 곳으로 1939년에 건축 된 제각과 별장이다. 한옥을 기본으로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이색적 건물로서 본래 밀양 박씨문중의 소유였으나 2002년 보성군에 기부체납 되었다. 문간채에 2층의 누각이 서 있어 소설에서는 현부자가 이 누각에 올라 앉아 기생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면서 자기 소유의 농토를 내려다 보는 것으로 그려졌다.
소화의 집
소재지 : 벌교읍 회정리(현부자네 집 앞)
2007년 복원 건립. 소설 속 현부자네 전속무당인 월녀와 딸 소화가 살았던 집으로 그리면서, 소화를 통해 봉건사회의 폐해를 고발하고 있다.
옛 벌교교회 : 회정리교회(현 대광어린이집)
소재지 : 벌교읍 회정리 624
1935년 건립되어 벌교교회로 유지되어 오다가 1985년 이 교회 재단이 벌교읍 벌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이전한 후 2002년 내부를 개조하여 유치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회정리 교회로 등장하여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묘사되며, 소설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벌교교회당'이라는 음각이 남아있다.
부용교(소화다리)
소재지 : 벌교읍 회정리
1931년(소화6년)에 건립된 시멘트 교량이다. 누군가 친일의 뜻으로 소화(昭和)다리라고 불렸던 것이 지금까지도 소화다리로 불리고 있다. 여순사건 때 이리저리 학살당해 '소화다리 아래로 버려진 사람들의 시체가 갯물이고 갯바닥에고 질펀하게 널렸었다(조정래, 태백산맥, 제 1권 86)'는 소설속에서의 묘사와 같이 실제로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을 낳았던 현장이다.
철다리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1930년 경전선 철도 부설되면서 건설된 교량. 철다리 아래 선착장 주변부터 부용교까지의 포구 주변에 일본인이 수탈한 물자보관창고가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벌교 주먹패들이 대장을 결정하는 결전 장소로 그려진 곳이다.
벌교역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890-1
1930년대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사가 건립되었다. 20여평의 대합실 및 사무실로 된 목조 건물이었으나 노후하여 1988년에 철거하고 한옥 형태의 새 역사가 건립되었다. 소설속 벌교역에서는 국회의원을 마중하고 전송하느라 도열, 계엄사령관의 부임 행사 및 염상진의 목이 내걸린 일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보성 벌교 농민상담소(구 벌교 금융조합)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512-16
등록문화재 제226호
1919년 건립된 일제강점기 금융조합으로 전형적 일본식 관공서의 형태이다. 내부 영업대, 금고가 남아있으며 조합장 사택이 원형 보존. 현재 농민상담소로 운영되고 있다. 소설 속 송경희의 아버지인 송기묵이 금융조합장으로 등장. 이후 유주상이 금융조합장을 차지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홍교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153
보물 제 304호
원래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지명으로 지어질 만큼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홍수 때마다 끊기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1728년(영조 4)에 전라남도 지방의 대홍수로 이 다리가 무너져서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석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 다리로 만들어졌다. 횡갯다리라고도 불리는 홍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4개의 홍애교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도 홍교는 벌교의 근원이자 상징으로 등장하고 김범우가 다리를 건너다가 멈춰서서 지역과 역사를 되새겨보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김범우의 집(현 임봉열 가옥)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원래 지역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사랑채, 겹안채, 창고터, 장독대, 돌담 등 가옥 규모가 대지주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 속 양심적 대지주 김사용(김범우 아버지)의 집으로 등장한다. 독립군 자금과 일본인 후원을 동시에 해야만 했던 이중적인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중도방죽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등에 업은 일본인 '나카시마'가 1929년부터 시행, 1930년대 초반에 완공한 장양리 간척지 뚝길이다. 현재는 산책로를 조성해 놓아 포구를 바라보며 걷기에 좋다. 소설 속에서 소작인들이 바다를 메우고 논을 만드는 고통을 그리고 있으며, 정현동사장이 논을 염전으로 만들려다가 농민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채동선 생가, 음악당
1901년 벌교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 하였고, "고향","향수","압천" 등을 만들었으며 1백 여 편에 달하는 민족성과 애국성을 지닌 음악을 남겼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국악을 채보 하였으며 해방후 현실참여 속에서 당시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음악사조를 벗어나 가곡 "조국, 독립축전곡, 한강수, 개천절 노래, 3.1절 노래,선열 추모가" 등 애국적인 곡을 만들었다. 6.25 전쟁 부산 피난시절 마지막 작품으로 "무궁화 노래"를 남기고 53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벌교 채동선 음악당 앞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져 있다.